미에쓰 해군소의 역사

미에쓰 해군소의 개요

에도 시대 사가 번은 번소유의 일본식 목조선을 관리하는 후나야를 영내에 6군데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미에쓰에 있었습니다.

안세이 2(1855)년 사가 번은 막부가 개설한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 많은 번사를 파견해서 항해나 조선의 지식·기술을 배우게 했습니다.

한편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에서 배운 것을 번내에 널리 알려 주기 위해서 안세이 5(1858)년에 오후나야가 있었던 미에쓰에 오후나테 게이코쇼(선원훈련소)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미에쓰 해군소의 시작입니다.

현재 그 부근 일대는 사노 쓰네타미 기념관과 역사공원으로 구성되는 사노 기념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습니다.

외국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미에쓰 해군소

영국 배 페이톤호 사가 번은 에도 시대에 막부의 명령으로 후쿠오카 번과 교대로 나가사키를 경비하고 있었습니다.

분카 5(1808)년 사가 번의 경비 당번 때에 “페이튼 호 사건”이 일어납니다.

영국 배의 ‘페이튼 호’가 네덜란드 배로 위장해 나가사키항에 침입하고 네덜란드 상관원(商館員)을 인질로 땔나무나 식료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외국 배에 대항하는 병력이 없었던 나가사키 봉행소나 사가 번은 그 협박에 굴복해 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책임을 묻게 된 막부의 담당관(나가사키 봉행)이었던 마쓰다이라 야스히데는 할복, 사가 번 번주 나베시마 나리나오는 근신처분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사가 번은 구미 여러 나라의 위협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덴포 11(1840)년 청국(현재의 중국)과 영국과의 사이에서 아편 전쟁이 일어나 영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승리했습니다. 당시 대국이라고 보고 있었던 청국의 패배에 의해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출에 강한 위기감을 품은 사가 번은 외국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 서양식 해군의 창립이나 서양식 함선의 정비를 촉진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교육, 훈련, 조선의 장소로 기능한 미에쓰 해군소

안세이 6(1859)년에 나가사키 해군 전습소가 폐쇄되면서 사가 번은 독자적인 해군의 훈련을 하게 되고 이것에 따라 ‘오후나테 게이코쇼(선원훈련소)’의 기능, 범위가 확장되고 해군시설로서의 체재를 갖추어 가게 됩니다. 분큐 원(1861)년까지는 서양식 배의 수리에 사용하는 부품을 만드는 ‘제작장’이나 수리 등을 위해서 배를 끌어 넣는 ‘온슈후크바’ 등이 정비되어 미에쓰 해군소는 막부 말기의 사가 번의 서양식 배에 의한 해군교육, 배의 조종이나 사격 등의 훈련, 배의 수리나 배를 만드는 시설로서 기능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실용 증기선이 된 ‘료후마루’는 게이오 원(1865)년에 거기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막부 말기 사가 번의 역사유산

미에쓰 해군소가 창설되기 전부터 사가 번에서는 서양기술을 배우고 연구하고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쓰이지 반사 화로 유적·정련방(精煉方)유적·다후세 반사 화로 유적은 미에쓰 해군소와도 관련이 깊고 막부 말기 사가 번이 근대과학기술의 도입에 노력한 것을 나타내는 산업유산입니다.

  • 쓰이지 반사 화로 유적

  • 정련방(精煉方)유적

  • 다후세 반사 화로 유적